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S반 (문단 편집) === 베를린 장벽 건설 이전 (1945 ~ 1961) === 통념과는 달리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동서독간 노선망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의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다만 50년대부터 차내 검표와 유사한 형식으로 차내 검문이 이루어지고, 일부 동베를린 역들에 입출경 심사대가 설치되는 등 형식적인 검문이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1958년에는 이 차내 입출경 검문 의무를 피하기 위해 [[증기기관차]]와 일반철도 선로를 사용해 서독 구간을 통째로 무정차하는 열차도 생기긴 했지만, 대부분의 열차는 동서독 구간을 함께 운행했다. 따라서 동독을 탈출하고자 했던 주민들은 그냥 대놓고 S반을 타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인 1961년 8월 초 기준으로 '''매일''' 1500명의 동독인이 S반을 타고 서독으로 탈출했다. [[https://www.dw.com/en/metro-was-cause-of-conflict-and-means-of-escape-in-divided-berlin/a-4684448|#]] 영화 [[작가 미상]]에서도 베를린 장벽 건설 직전에 동독인인 주인공 커플이 동베를린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역]]에서 그냥 서베를린 [[베를린 초역]]행 S반 만원열차에 올라타 검문을 피하고 동독을 탈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동독 정권은 탈출을 막기 위해 큰 짐을 가진 승객들을 특별히 검사하곤 했다. 따라서 2차 대전 종전부터 1951년까지의 노선도는 동서 베를린 구분조차 거의 표시하지도 않았고, 1951년부터 1961년까지는 항상 어디까지가 서베를린 구간인지, 어디까지가 동베를린 구간인지를 항상 표시해서 양쪽 시민들이 무심코 상대방 국가에 진입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정도였다. [[https://www.s-bahn-galerie.de/S_Bahn_Berlin/xPlan_Bln/Plan_S_B_1940-1960.htm|#]] 동독 당국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서베를린과의 단절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베를린 철도교통의 중추였던 [[베를린 슈타트반]]과 [[베를린 순환선]]의 대부분 구간이 서베를린에 위치해 있었고, 당시 동베를린으로 들어오는 동독 국내 철도 교통의 상당수는 서베를린 구간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에 무작정 서베를린을 틀어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동독의 철도망이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형태였기 때문에 동독 국내 이동을 위해 서베를린에서 환승해야만 하는 경우도 많아 동독 주민들에게 국내 이동을 위해 서베를린에서 환승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장벽을 지었다간 동독 철도망이 마비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동독 정부는 서베를린을 통째로 우회하는 베를린 외곽순환선 철도의 건설에 착수했고, 1961년 5월 외곽순환선의 마지막 연결선이 완공되면서 같은 해 8월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